존재하지 않는 존재를 사랑하게 된 시대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허무는 새로운 산업이 떠오르고 있다. 바로 '버추얼 휴먼 산업'이다. 인간처럼 말하고 웃으며 감정을 표현하는 디지털 존재들이 광고, 방송, 고객 응대, 심지어 K-POP 무대 위에까지 등장하고 있다. 이 글은 단순한 기술 소개가 아니다. 우리는 왜 존재하지 않는 존재를 사랑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그들이 산업의 최전선에 서 있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다룬다.
인스타그램을 스크롤하다가 멈췄다. 익숙한 표정, 스타일리시한 옷차림, 수십만 개의 좋아요. 사진 속 소녀는 누가 봐도 인기 있는 셀럽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는 존재하지 않았다. '릴 미켈라', 미국의 버추얼 인플루언서. 사진 속 인물은 사람이 아닌, AI와 3D 기술로 만들어진 디지털 인간이었다.
비슷한 시기, 한국에서는 버추얼 보이그룹 'PLAVE(플레이브)'가 음악 방송에 등장했다. 다섯 명의 멤버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지만, 팬들과 소통하고, 노래하고, 실시간 방송까지 진행한다. 무대 위의 PLAVE는 실제 아이돌과 다를 게 없었다. 오히려 더 매끄럽고, 더 완벽하게 보였다.
우리는 지금, 존재하지 않는 존재에 감정을 느끼는 시대에 살고 있다. 누군가가 만든 가상의 인간에게 마음을 주고, 팬이 되며, 때론 그들에게서 위로를 받는다.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일까? 그리고, 그들의 존재는 누구의 것인가? 더 나아가, 존재조차 소유되는 사회에서 인간은 어떤 자리에서 살아가고 있는 걸까?
버추얼 휴먼 산업, 광고 시장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
버추얼 휴먼은 이제 광고 산업에서 핵심 인플루언서로 자리 잡고 있다. 미국의 버추얼 인플루언서 릴 미켈라는 삼성전자의 갤럭시S10 광고 모델로 활동하며, 2022년 한 해에만 약 1,700만 달러(약 225억 원)의 수입을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국내에서도 버추얼 휴먼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싸이더스 스튜디오 엑스가 만든 로지(Rozy)는 반얀트리 호텔, 쉐보레 전기차 등의 광고에 출연하며, 2021년 한 해에만 10억 원 이상의 수입을 기록했다. 스마일게이트의 한유아(Han YuA)는 광동 옥수수수염차 광고 모델로 활동하며 주목받았다.
기업들이 버추얼 휴먼을 선호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다양한 활동이 가능하며, 소비자의 취향과 요구를 유연하게 반영할 수 있다. 또한, 실제 인간과 달리 스캔들 등의 리스크가 적어 브랜드 이미지 관리에 유리하다.
그러나 최근 들어 유사한 콘셉트의 버추얼 휴먼이 증가하면서 차별화의 어려움과 기업들의 자체 제작 경향으로 인해 경쟁이 심화되고 있다. 이 산업은 지속적인 혁신과 독창성을 요구받고 있다.
인간은 스스로 연출되고 소비되는 존재가 되어간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진짜를 원하고 있는가?
PLAVE는 왜 사람보다 더 사람 같았을까
2023년, 음악 방송 무대에 낯선 아이돌 그룹이 등장했다. 이름은 PLAVE. 정교한 외모, 완벽한 안무, 실시간 소통까지. 누가 봐도 실력 있는 K-POP 그룹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PLAVE의 다섯 멤버는 모두 버추얼 캐릭터다. 보이지 않는 사람이 목소리와 움직임을 맡고, 기술은 그들을 현실처럼 구현한다. 팬들은 그들의 고민에 공감하고, 위로받는다. 존재하지 않는데도.
그렇다면 묻게 된다. 존재하지 않는 존재에게 감정을 느끼는 건 진짜일까? 그들의 감정은 누구의 것이며, 그 존재는 누구의 것인가?
우리가 사랑하는 이 아이돌은 누군가의 기획으로 탄생한 상품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들을 믿고, 감정으로 연결된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진짜와 가짜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버추얼 휴먼은 어떻게 진화하고 있는가
버추얼 휴먼은 그 기술적 구현 방식에 따라 '실사형'과 '캐릭터형'으로 나뉜다. 실사형 버추얼 휴먼은 실제 사람을 촬영한 후, CG 작업과 3D 모델링을 통해 현실감 있는 외형과 움직임을 구현한다. 국내 최초의 버추얼 인플루언서인 로지가 그 사례다. 반면, 캐릭터형은 2D 또는 3D 애니메이션 기술을 활용해 창조된 가상 캐릭터로, 주로 '버추얼 유튜버'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버추얼 휴먼의 역사는 1998년 사이버 가수 '아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는 기술적 한계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현재는 인공지능(AI)과 확장현실(XR) 기술의 발전으로 실제 인간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해졌다. 특히, 챗GPT 같은 생성형 AI의 등장은 버추얼 휴먼에 사고 능력을 부여하고, 인간과의 상호작용을 훨씬 자연스럽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기술적 진화는 버추얼 휴먼이 메타버스, 엔터테인먼트, 광고 등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하게 만들었다. 사생활 노출이나 스캔들 위험이 없고, 시공간의 제약 없이 활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업들의 관심은 더욱 커지고 있다.
버추얼 휴먼 기술 분류 요약
- 실사형: 실제 인물 기반, 모션캡처 + 3D 모델링 (예: 로지)
- 캐릭터형: 순수 창작 기반 2D/3D 애니메이션 (예: 버추얼 유튜버)
- 지능형: 생성형 AI 기반 대화 및 반응 가능 (예: 챗GPT 탑재형 버추얼 휴먼)
그들은 누구의 존재인가
버추얼 휴먼은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기획하고, 설계하고, 투자하고, 통제한다. 외형은 디자이너가 만들고, 감정은 시나리오 작가가 설정하며, 움직임은 성우와 모션캡처 연기자가 구현한다. 그 뒤에는 언제나 기업이 있다.
기술은 점점 더 사람 같은 존재를 만들어내고 있지만, 그 존재는 어디까지나 소유 가능한 자산으로 관리된다. 음악을 만들고, 팬과 소통하며, 위로의 말을 전하더라도, 그 감정조차 기획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질문을 피할 수 없다. 그들은 누구의 존재인가? 존재가 누군가의 소유가 될 수 있다면, 인간은 정말 자유로운가?
우리는 존재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소유된 존재가 주는 안정감과 서사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구조는 점점 더 정교해지고 있다.
진짜와 가짜의 경계는 어디인가
버추얼 휴먼은 인간보다 실수하지 않고, 감정을 적절히 조절하며, 항상 완벽한 외모를 유지한다. 팬들과의 소통은 사전에 기획된 각본 위에서 이루어지며, 거친 현실의 감정 대신 정제된 감동을 준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안정감과 이상적인 이미지를 동시에 받는다.
이런 버추얼 존재는 점점 실제 인간을 밀어내고 있다. 방송, 광고, 엔터테인먼트에서 '더 믿을 수 있는 존재'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묻지 않는다. 그들은 진짜인가? 진짜와 가짜를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가?
더 나아가, 인간조차 스스로를 가공한다. 필터를 쓰고, 이상적인 삶을 꾸며 보여주며, 가짜에 가까운 진짜가 되어간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를 더 신뢰해야 할까? '진짜 같은 가짜'인가, 아니면 '가짜 같은 진짜'인가?
존재조차 소유되는 사회에서 인간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더 이상 존재 여부보다, 얼마나 진짜처럼 보이느냐를 따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실재보다 연출이 중요하고, 감정의 진위보다 감정이 주는 효과가 우선이다. 버추얼 휴먼은 그 모든 흐름의 최전선에 있다.
그들은 실패하지 않고, 늙지 않으며, 예상 밖의 행동도 하지 않는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현실의 인간 대신, 통제 가능한 가상의 인간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묻게 된다. 존재가 소유될 수 있다면, 인간은 어디까지 자유로울 수 있을까? 사랑할 수 있지만 책임질 필요 없는 존재를 추구하는 사회는 인간다움을 지키고 있는가?
버추얼 휴먼은 단지 기술의 산물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새로운 거울이다. 그리고 그 거울 속엔, 점점 더 연출되고 소비되는 존재로 변해가는 인간이 비친다.
우리는 이제 선택해야 한다. 기술이 만든 존재를 통해 인간을 대체할 것인가, 아니면 인간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그 존재를 바라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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